빈집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2. 09:00

빈집

淸羅 嚴基昌
지난 가을 사립문 닫힌 뒤에
다시는 열리지 않는
산 밑 기와집

겨우내
목말랐던
한 모금 햇살에
살구꽃만 저 혼자 자지러졌다.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집 하나 비고
집 하나 빌 때마다
논밭이 묵고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골목마다
농성하듯 손들고 일어서는
무성한 풀들

저 넓은 논밭은 이제 누가 가꾸나.

posted by 청라

王竹으로 사소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7. 4. 1. 09:00

王竹으로 사소서 <訟詩>

淸羅 嚴基昌
당신 곁에 서 있으면
왕대나무 잎새에서 일어서는
청아한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 곁에 서 있으면
대쪽같이 곧아서 서슬 푸른
티 하나 없이 맑은 마음 한 자락이 보였습니다.

흔들리던 역사의
골짜기에서도
굳게 뿌리를 내리시고

죽순처럼, 제자들
대숲 청청한 목소리로 길러내셔서
삼천리 방방곡곡
竹香 그윽한 세상 만드셨습니다

온 세상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굽힘없이 걸어오신 그 길 위에
가을빛 노을
곱게 물들었습니다.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에게
비오니

억만 세월 굽힘 없이 하늘 받쳐 들고
꺾어도 꺾이지 않는
王竹으로 사소서

전성국 교장선생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posted by 청라

후리


후리

淸羅 嚴基昌
한 개의 줄 끝에 걸리는 바다
거대한 뚝심
어잇차. 어잇차.
가는 실을 타고 들어와
내 허망한 마음 받쳐 주는
그대 사랑의 똑딱선 소리.

그물을 던질 때에
빛나며 가라앉는 우리들의 꿈
눈시리게 투명한 바다의 속살
어둠처럼 막막한 바람기를 옭으면
어잇차, 어잇차,
먼 수평 푸른 달빛 아래
바다의 꼬리에서 이는 하이얀 풍랑.

사람들의 마음마다 풍랑이 울면
한 끝씩 접혀가는 바다의 투지
힘주어 딛고 있는 힘줄이 끊어지며
달빛 아래 퍼덕이는 절망의 바다.
어잇차, 어잇차,
지난 겨울 춤추던 폭풍의 칼날이 눕고
몇 사내가 버리고 간 유언이 빛나고
끌려온 바다는
우리들의 발밑에 헐떡이고 있다.

*후리 : 강이나 바다에 넓게 둘러친 후에 그물 양쪽에서 여러 사람이 끌줄을 잡아당겨 물고기를 잡는 큰 그물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