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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7시집에 해당되는 글 26건
- 2025.02.03 눈 오는 밤에
- 2024.12.23 가을 독수리
- 2024.12.18 약속
- 2024.11.29 공명共鳴
- 2024.10.29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 2024.10.03 여름날의 귀향 3
- 2024.09.27 산을 마시다
- 2024.08.14 혼자 사는 친구에게
- 2024.08.02 하일夏日 점묘點描
- 2024.07.11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글
눈 오는 밤에
한 사흘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평생 쌓아올린 이름도 벗어놓고
예닐곱 살 어린 날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눈 속에 고구마를 몰래 묻어놓으면
길어도 헛헛하지 않던 겨울밤
화롯가에 모여앉아
할머니 옛 얘기에 눈을 반짝이며 가슴 졸이던
추억의 도화지에
평생을 그리운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밤새도록 꿈 밭에서 서성이고
형이 뒤척이면 이불 밖에서 내 다리가 얼던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들 모두 막아놓고
예닐곱 살 그 날에 갇혀봤으면 좋겠다
글
가을 독수리
한화이글스 우승을기원하며
창공에 독수리가 날아올라야
가을이다
양 발톱에 호랑이 사자를 움켜지고
창날 같은 부리로
곰을 쪼아 물고
하늘 가장 높은 꼿
날고 있어야 가을이다
봄날의 비바람과 여름날의 천둥도
독수리 비상을 위한
하늘의 안배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라
가을 독수리는 목소리에도 힘이 올라서
한 번 호령하면
산천이 떨고
추풍낙엽으로 떨어져야 가을이다
글
약속
너라도 있어야 솜털만큼
꿈 꿀 수 있을게 아니냐
피는 꽃 뜨는 달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게 아니냐
곧바로
암흑으로 떨어져
숨을 멈추는 일이 없을게 아니냐
글
공명共鳴
지우다 만 연지처럼
젊음이 다 못 바랜 단풍잎 위에
엄중한 선고인가 눈이 내린다
아내여
이룬 것 다 버리고
다섯 살로 돌아갔지만
당신의 웃음이 너무 맑아서
가슴으로 울린다네
웃음 속에 숨어있는 진한 통곡이
글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세상일들이
바싹 마른 북어 맛처럼 밋밋해지면
자작나무 숲으로 가자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릴 때
하늘 끝에 팔랑대는 잎새들이 불타는 색깔로
옷을 갈아입듯이
사랑이 메말랐던 내 가슴에도 단풍이 익는다네
오오, 천둥이여
자작나무에 기대어 가을을 안아주면
쿠르릉 쿠르릉
몸속에서 일어서는 천둥이여
오랫동안 시들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세월에 속아서 차갑게 식었던 사랑이
봄풀처럼 손들고 일어서는 아우성이여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내려서
미워했던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는
눈물 많은 나를 찾았다네
산이 속삭이는 말을 알아듣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젊어져서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를 찾았다네
글
여름날의 귀향
골목은 사막처럼 비어있었다
분꽃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노인들
삭정이 마른 기침소리만 남아있었다
회재를 넘으면 언제나
된장찌개 냄새 마중 보내던 어머니
옛집 마당가에 돌절구로 서있고
저녁때면 부르던 정다운 목소리에 별 촘촘 달던
감나무 묵은 둥치엔 허기진 꿈들만 무성했다
그리운 얼굴들 하나씩 소환하며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그리움은 늦여름 파장처럼 비틀거리는데
사람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 대문 닫히고
한 집 대문 닫히면 한 역사에 거미줄이 그어지고
풀들만 웃자란 건너 마을 초등학교에선
언제 또 정다운 종소리가 부르려는지
낯선 나라 언어들로 삭막해져서
어린 날 손때 희미해진 내 골목길에 가슴을 치며
홍시처럼 노을만
소멸되어가는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글
산을 마시다
아침 인사를 하려고
창밖을 보니
산은 가을 안개에 안겨있다
붙어산다고 꼭 정다운 것은 아니다
멀리서 손에 잡힐 듯 타오르는 초록을
한 모금 마신다
래미안아파트 17층
사람 사이에 묻혀 있어도 산과 한몸이 되면
마음속에서 샘물이 솟는다
외로운 사람에겐 꾀꼬리소리를 보내주고
고달픈 사람에겐
고촉사 목탁소리를 보내 달래주고
세상의 바람소리 잠재운 내 가슴의
둥지에
이름 모를 새는 알을 낳는다
글
혼자 사는 친구에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똑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평생을 등 기대고 부대끼며 살다가
나들이 끝내고 돌아가는 것
손 흔드는 뒷모습 허전하지 않게
씨앗 몇 알갱이 떨어뜨리고
큰 나무로 자라게 거름이나 주면서
싸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
아이들 많은 집안은 가난해도 부자이다
자식들 꿈들은 모두 다 내 재산이다
허공 높이 소망을 연처럼 띄워놓고
하늘까지 오르도록 줄 함께 잡고 버티다 보니
이제 나는 알겠다
기르는 게 두려워 외롭게 사는 것보다
날마다 전쟁이라도
웃을 일 풍성한 게 행복이라는 걸
글
하일夏日 점묘點描
매미소리 한 줄금
골목을 쓸고 간 후
배롱나무 가지에 타오르는
늦더위 송이송이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마을회관 공터에는
고추잠자리만 하루 종일 맴돌다 간다
소 울음 닭소리도 잦아든 지 오래
노인 하나 산으로 가면 한 집씩
사립문 닫히는 마을
봉숭아꽃 몇 번을 피었다 져도
금줄 걸린 집 하나 찾을 수 없고
접동새 흐느낌만
어둠처럼 내리고 있다
글
늙은 투사의 저녁 술자리
친구들 더러는 여의도에 가고
모두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신문마다 이름들 반짝반짝 빛나는 저녁
혼자 앉아 김치 안주로
소주 몇 잔 꺾고 돌아앉는 어둠에
푸념처럼 슬그머니 떠오르는
벼린 초승달
무엇을 이루려고 젊은 날을 불살랐는지
권력놀음에 취해
서로에게 총질하는 서글픈 창문 너머로
삭막해진 산하를
그래도 촉촉하게 붙잡아주는 개구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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