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의 북소리

시/제7시집 2023. 10. 26. 20:14

명량의 북소리

 

 

울돌목에 나가 바다를 살포시 안아보아라

반천 년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북소리

가슴에 단심丹心이 화인火印처럼 찍혀있는

진도 사람들은 알리라

몸은 떠났지만 마음은 떠나지 못한 충무공의 염원이

울돌목 북소리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진도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숨을 쉬듯이

저 소리를 마시며 자랐기에

나라 사랑의 마음이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진도 사람들 피는 진달래 꽃빛이다

나라가 불의로 덮여있을 때 명량의 북소리로 일어서서

해일처럼 온 나라를 쓸어내는 저 간절한 의지

진도 사람들 목소리엔 천둥이 들어있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정수리에

벼락을 내리치는 강렬한 용기

황토마을 사람 중에 나라 사랑의 빛깔이 더 붉어서

충무공의 큰 칼이 오래 입은 옷처럼 편한 진도 사람들

진도에 살아서 진도 사람이 아니다

타지에 나가서도 혈맥을 통해 명량의 북소리가 울려오니까

진도 사람이다

명량의 북소리가 첨찰산 상봉에 닿아 봄이면 동백꽃 향기

피어오르는 것을 멀리서도 그리워하니 진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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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반이다

시/제7시집 2023. 8. 17. 08:51

사랑이 반이다

 

 

꽃이 없는 봄은 봄이 아니다

봄이라는 이름엔 꽃이 반이다

산수유 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만개해야만 우리는

기나긴 겨울을 털어냈다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삶이라는 이름의 절반은 사랑이다

그리움과 아픔도 사랑에서 온다

어느 날 파뿌리처럼 하얘진 머리카락

거울에 비춰 보며

흘러간 시간의 유역 한 지점을 그리워하거나

기쁠수록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가 일찍 시들어서 이젠 웃을 일이 없다

우리의 인생길엔 사랑이 반이다

posted by 청라

프리즘 사랑

시/제7시집 2023. 4. 8. 22:27

프리즘 사랑

 

 

마음의 굴절을 재어본다

 

아내여

네게로 가는 내 사랑은

보라 빛깔이다

 

단파장이라서

언제나 망설임이 없다

 

가장 빨리 꺾여서

너에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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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시/제7시집 2023. 3. 19. 08:24

봄날은 간다

 

 

절규처럼

홍매화가 피었습니다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들어가는 당신

지난겨울

봄이 오지 않아도 좋다고

세월의 고삐를

소망의 문고리에 굳게 매어 놓았는데

어김없이 매화꽃이 피었습니다

향기 따라 봄날이 흘러갑니다

 

posted by 청라

삼월 마중

시/제7시집 2023. 3. 9. 19:27

삼월 마중

 

 

산다는 건 추운 일이다

 

아직 예순도 다 저물지 않았는데

당신의 가을엔 일찍 눈이 내렸다

 

사방으로 쪼그라든 당신의

영혼을 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직 내 청춘의 푸른 설렘은

나비인양 파닥거리는데

당신은 그만 어깨동무를 풀려하는가

 

동백이 피면 겨울을 건너뛸까

아침마다 아리셉트를 챙겨 먹이며

삼월을 마중간다

 

posted by 청라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시/제7시집 2020. 5. 17. 10:09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지난 생일에 내가 사준

진주 반지의 영롱한 빛깔도 흐려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여섯 살 손자의 이름도 낯설어지고

가끔은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아서

자다 말고 문득 일어나 내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의 저 간절한 주문呪文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시문학2020년 8월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