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마중

시/제7시집 2023. 3. 9. 19:27

삼월 마중

 

 

산다는 건 추운 일이다

 

아직 예순도 다 저물지 않았는데

당신의 가을엔 일찍 눈이 내렸다

 

사방으로 쪼그라든 당신의

영혼을 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직 내 청춘의 푸른 설렘은

나비인양 파닥거리는데

당신은 그만 어깨동무를 풀려하는가

 

동백이 피면 겨울을 건너뛸까

아침마다 아리셉트를 챙겨 먹이며

삼월을 마중간다

 

posted by 청라

대보름달 떴다 

 

우리들의 아픈 시간은

해가 지고 나서 다시 달이 뜨는 시간만큼의

잠깐이었으면 좋겠다

불 깡통에서 눈썹 센 별들이

은하처럼 쏟아지는 만큼의 찰나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마음에 둥그렇게 달이 떠오를 때

달집을 사른다

코로나로 아파하는 사람들의 겨울을 태우고

먹을 것이 없는 마을의 막막한

그믐밤의 절망을 태우고

액운이 깃든 영혼의 저고리 동정을 태우듯

세상의 모든 아픔을 불속에 던져 넣는다

보아라!

망월굿 춤사위 속

그림처럼 살아나는 우리의 산하

먼 산이 검은 그림자 딛고 일어서고

나무들 찬바람 속에서도 분분이 손 흔들어

봄을 부르노니

시대의 밤아 가거라

우리들 마음 가장 높은 곳 어느새 하늘만한

새 정월의 대보름달이 떴다

 

 

 

 

posted by 청라

도자기 무덤에서

 

 

흠 있는 것들끼리 거기 모여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다

 

깨어진 것들끼리 거기 모여서

서로의 절망을 다독여준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은 모르리라

이렇게 어둡고

추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삶의 받침대에

손때 한 번 못 묻히고

 

지옥 불 나오자마자

산산이 깨어진 목숨이 있다는 것을

 

 

 

posted by 청라

징검다리

징검다리

 

 

하나쯤은

이가 빠져 있어도 좋다

 

네가 내게 들어와

삶을 춤추게 하던 그 다리 같이

 

등이 간지러운 시간만큼

설렘이 부풀어 올라

 

그 날 산바람에 묻어오던

뻐꾸기 소리처럼

올 것만 같다

 

한 번 업은 후에

평생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아 

posted by 청라

팔월의 눈

팔월의 눈

 

 

그 날 아버지는 구급차를 타고

눈보라치는 연미산 고개를 넘으시면서

하얗게 덮인 금강의 백사장이며 빨랫줄처럼 흔들거리는

공산성의 성벽들을 샅샅이 눈에 담으셨다.

내가 이제 여기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아버지의 쉰 목소리에서 눈바람소리가 울렸다.

쉰아홉에 휘몰아친 팔월의 눈보라

간이 돌처럼 딱딱해져서

수술도 할 수 없다는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몇 마지기 땅뙈기로 아들 셋을 대학 보내며

꿈꾸었을

아버지의 무지개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나는 벌판처럼 쓸쓸해진 그의 시선을 피해

너무도 일찍 와버린 아버지의 겨울을 생각했다

첫 월급을 타서 보낸 한약 한 재가

아버지의 삶에 이른 눈보라를 불러왔을까

아들의 첫 선물에 너무도 좋아하던 환한 얼굴 너머로

죄책감처럼 몰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꺼질 듯 꺼질 듯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삶의 된서리에도 푸르게 견뎌가던

명아주 한 포기 시들어가는 소리였다.

그 해에는 눈도 참 일찍 왔다

posted by 청라

득음得音

득음得音

 

 

상수리나무 잎새에 매미 소리가 박혀있다

한 달의 득음得音을 위해

칠 년을 침묵의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한

고단한 생애가 판화처럼 찍혀있다

매미는 알았을 것이다 때로는 덧없는 길도

묵묵히 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노래 한 곡 반짝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명가수의 뒷모습이나

하루의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살이의 우화羽化

결코 부질없는 생애는 아니라는 것을

매미가 한 달을 소리쳐 울기 위해

칠 년을 고행 하듯이

시 한 편 남기기 위해 메아리 없는 외침

수도 없이 외쳐대는 시인들이여

모아이 석상처럼 매미는 시력을 반납한 채

껍질로 남아 지켜보고 있다

자신의 득음得音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려줄 것인지

사람들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인지

세상에 무의미한 생애란 없다

 

posted by 청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가을은

오래 묵혀두었던 그리움을

꺼내보게 하는 계절

 

은행잎마다 내려앉은

노란 그리움에 같이 물들다 보면

서랍 속에 넣어둔 편지를 읽게 된다

 

그리움은 나비이다

 

보고싶다보고싶다보고싶다

갈바람 한 줌에도

무수히 날아오르는 그리움의 군무

 

진정한 그리움은

너에게 닿지 못 한다

간절함의 무게로 떨어져 흙이 된다

 

줍지 마라

흘러간 사랑은

흙이 묻은 채 그냥 놓아두어라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 아름답다

posted by 청라

가을의 파편

 

 

조그만 은행잎엔

오롯이 가을이 담겨있다

 

속삭이는 햇살과 나른한 눈빛

포근히 안아주는

고향의 마음

 

나는

가을이 가장 눈부시게 내려앉은

은행잎 한 장 가슴에 깔고

세상에 반짝이는 모든 슬픔들

널어 말린다

 

꽃처럼 떨어진 젊음들과

레일에 깔린 비명

노릇노릇 향기롭게 말라갈 때쯤

 

!

세상의 눈물들아 이젠 모두 가자고

나비처럼 모여 팔랑대는 가을의 파편

 

posted by 청라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세상을 환하게 한다

 

쓰르라미 울음으로 저물어가는

여름의 황혼 무렵

 

지다 만 능소화 가지 끝에 피어난

저 진 주황빛 간절한 말 한 마디

 

바람의 골짜기에

향기로운 웃음을 전하면서

 

너는

사랑을 잃은 친구의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해준다

 

보라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남의 살 찢으려고 날을 세우는 것들

널린 세상에

 

벌 나비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 안고

젖을 물리듯 자장가 불러 주는

세상의 어머니여!

 

내생에서는 잠시라도

너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고 싶다

posted by 청라

벌레의 뜰

 

 

화랑곡나방 한 마리

회백색 호기심 활짝 펴고 내 주위를 선회한다

시가 싹트는 내 서재는 벌레의 뜰이다

어디에서 월동했다 침입한 불청객일까

날갯짓 몇 번으로 시상詩想에 금이 마구 그어진다

홈·키파 살그머니 든다

그리고 놔두어도 열흘 남짓인 그의 생애를 겨냥한다

내 살의殺意가 뿜어 나오고 떨어진 그의 절망을

휴지에 싸서 변기에 버리면

깨어진 시가 반짝반짝 일어설까

창 넘어서 보문산이 다가온다

고촉사 목탁소리가 함께 온다

벌레야 벌레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나도 한 마리 나방

푸르게 날 세웠던 살생을 내려놓는다

벌레하고 동거하는 내 서재는 수미산이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