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밤에

시/제7시집 2025. 2. 3. 07:10

눈 오는 밤에

 

 

한 사흘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평생 쌓아올린 이름도 벗어놓고

예닐곱 살 어린 날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눈 속에 고구마를 몰래 묻어놓으면

길어도 헛헛하지 않던 겨울밤

화롯가에 모여앉아

할머니 옛 얘기에 눈을 반짝이며 가슴 졸이던

추억의 도화지에

평생을 그리운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밤새도록 꿈 밭에서 서성이고

형이 뒤척이면 이불 밖에서 내 다리가 얼던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들 모두 막아놓고

예닐곱 살 그 날에 갇혀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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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에서

시조/제3시조집 2025. 1. 20. 21:49

마곡사에서

 

 

부처님 저 미소를 한 동이 길어다가

한여름 목물하듯 여의도에 뿌려주면

금강경 소리 따라와 욕심의 때 씻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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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

시조/제3시조집 2025. 1. 19. 14:10

일편단심

 

 

겨울만 무성한 뜰에

한 줄기

봄빛인가

 

굽었던

허리 펴고

소리 한 번 내지르니

 

홍매화

꽃가지마다

영글어 핀

일편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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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 나와 보니

시조/제3시조집 2025. 1. 17. 18:33

들녘에 나와 보니

 

 

들녘에 나와 보니

가을 벌써 저물었다

 

먼지구름 덮인 나라

힘없음을 한탄하니

 

된서리 내린 머리에

눈 그림자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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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독수리

시/제7시집 2024. 12. 23. 10:00

가을 독수리

                          한화이글스 우승을기원하며

 

창공에 독수리가 날아올라야

가을이다

 

양 발톱에 호랑이 사자를 움켜지고

창날 같은 부리로

곰을 쪼아 물고

 

하늘 가장 높은 꼿

날고 있어야 가을이다

 

봄날의 비바람과 여름날의 천둥도

독수리 비상을 위한

하늘의 안배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라

 

가을 독수리는 목소리에도 힘이 올라서

한 번 호령하면

산천이 떨고

추풍낙엽으로 떨어져야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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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제7시집 2024. 12. 18. 09:24

약속

 

 

너라도 있어야 솜털만큼

꿈 꿀 수 있을게 아니냐

 

피는 꽃 뜨는 달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게 아니냐

 

곧바로

암흑으로 떨어져

숨을 멈추는 일이 없을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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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아프다

시조/제3시조집 2024. 12. 7. 17:31

남은 것은 아프다

 

 

찔레꽃 피는 길로

어머니 떠나던 날

 

뻐꾸기 하루 종일

눈물로 우짖었지

 

목숨의

피고 짐 사이

남은 것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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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共鳴

시/제7시집 2024. 11. 29. 08:19

공명共鳴

 

 

지우다 만 연지처럼

젊음이 다 못 바랜 단풍잎 위에

엄중한 선고인가 눈이 내린다

 

아내여

이룬 것 다 버리고

다섯 살로 돌아갔지만

 

당신의 웃음이 너무 맑아서

가슴으로 울린다네

웃음 속에 숨어있는 진한 통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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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미

시조/제3시조집 2024. 11. 7. 17:30

곡선미

 

 

어머니 버선볼에

일어선 선 하나가

 

기와집 처마 따라 나비처럼 너울대다

 

하늘에

높이 떠올라

반달 되어 걸렸다

 

달항아리 어깨선에

핏속으로 울려오는

 

조상님들 그 말씀이 옹이모양 박혀있다

 

자연과

한몸 되어라

혼자 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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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 무렵

시조/제3시조집 2024. 11. 1. 11:13

상강 무렵

 

 

하늘에 걸린 달은

세상을 비워내고

 

호수에 어린 달은

내 마음을 씻어낸다

 

첫 서리

때를 맞추어

세상 걱정 접으리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