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3. 00:25


靑年
淸羅 嚴基昌

청년은 스무 살 안팎 나이의
사내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모진 바람 앞에서도
초목처럼 싱싱한 꿈을 접지 않으며
한 번 발걸음 내딛으면
절대로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너희들이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이만큼 와서
한 자락 남은 삶의 비탈이 가파르다고
숨을 헐덕이며 쉬려 하느냐

잠은 달콤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면
네 옆을 걷던 사람들은 까마득히
뒷모습도 보이지 않아
길은 거기서 끊어지고

뒤돌아보는 발자국엔
아프게 달려온  고통의 흔적 헛되이 남아
아물지 않은 상처 화석으로 굳을 것이다

조금만 더 걸어라
가시덤불 우거져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너희들의 정상은
하늘과 어우러져 저 위에서 빛나고 있나니,

세월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흘러가더라도
멈추지 않는 사람의 가슴에
더 많이 고일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걸어라
고개는 거의 끝나 가는데
꿈꾸는 것을 그만 멈추려느냐

청년은 스무 살 안팎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어떤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고
헤쳐 가는 사람의 이름이다
posted by 청라

닭서리

수필/서정 수필 2007. 3. 11. 23:51

닭서리


淸羅 嚴基昌
 얼마 전 고향 친구 J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 사는 고향 친구들끼리 저녁이나 먹으려고 하니 시간 있으면 참석해 달라 한다. 일 년에 몇 번씩은 방문하는 고향이지만 도회에 나와 살면서 고향을 생각하면 늘 솔바람소리, 뻐꾸기 울음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친구들은 거의 떠나고 없지만 눈을 감으면 친구들의 얼굴은 늘 거기에 있고, 어릴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보석처럼 간직되어 있는 곳이기에, 타향의 거리를 헤매다가 외로움을 느낄 때면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늘 심심하지 않고 즐거웠다. 봄이면 얼음 풀리는 도랑에 나가 가재를 잡아 구워 먹고, 여름이면 냇물에 나가 미역을 감으면서 수박이나 복숭아 서리 할 음모들을 꾸몄다. 별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도 마냥 재미있어 깔깔거렸다. 가을이면 남의 밤나무 밑을 어정거리다 쫓겨 달아나기도 하고, 겨울이면 토끼몰이를 한다고 온 산을 헤매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어느 겨울밤 우리 조무래기 7, 8명은 친구 집에 모였다.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그 친구의 부모님께서  부산에 가고, 남매만 달랑 남아 밤이 무섭다고 하기에 집도 보아줄 겸 신나게 놀아보자는 계획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돌아가며 귀신 이야기도 하고, 윷도 놀고, 베개 싸움도 하다가 열 한 시가 넘어가자 입이 출출해졌다. 생고구마를 깎아 먹어도 동치미를 꺼내어 먹어도 우리들의 허기증은 가시지 않았다. 한 친구가 은밀하게 닭서리를 하는 게 어떠냐고 하였다. 아무도 망설이지 않고 재미있겠다고 눈을 반짝거렸다. 가위 바위 보로 닭을 잡아오는 행동대원을 3명 뽑고, 2명은 닭을 잡고, 나머지는 물을 끓이고 양념을 준비하는 조로 나누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지 물 끓이는 조에 뽑혔다. 행동대원으로 뽑힌 친구들이 밖으로 나간 지 한 시간쯤 지나 큰 닭 두 마리를 잡아왔다. 우리 작은 악당들은 약간의 두려움으로 눈을 감고 얼굴을 찡그리며 닭을 죽인 뒤에 이미 끓여놓은 물에 담갔다가 닭털을 뽑았다. 내장을 꺼내어 간이나 콩팥 등의 먹을 수 있는 내장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으슥한 땅에 묻었다. 무슨 요리사라도 된 듯이 마디씩 지껄이는 말들에 따라 마늘도 넣고 파도 넣고 그냥 푹 삶아 소금을 찍어 먹었다. 어설픈 요리솜씨임에도 우리들의 시장기는 순식간에 닭 두 마리를 뼈만 남겨놓았다. 새벽녘 헤어질 때 우리는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처럼 긴장한 모습으로 손을 잡고 이 비밀 무덤까지 가지고 가자고 굳게 약속하였다.
 집에 돌아와 살풋 잠이 든 듯한데

 “아이고 우리 닭. 아이고 우리 닭”

 어머님께서 외치시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벌써 새벽이 되어 날이 부옇게 밝았다. 닭장에 뛰어가 보니 큰 닭 두 마리가 없어졌다.

 “나쁜 놈들, 약아빠진 놈들……”

 이제 와 생각하니 친구들이 잡아왔을 때 왠지 그 닭들이 낯익었던 듯도 하다. 그런데 우리 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 닭서리 하다가 발각되어도 자기 아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어쩌려고 하는 고 놈들의 속셈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지만 이제 공범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같이 걱정하고 있는 아들이 범인인줄도 모르고 분해 펄펄 뛰시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 고향은 쓸쓸해 졌지만, 허전할 때면 가슴 설레고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posted by 청라

독도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0. 21:45

독도


淸羅 嚴基昌
외로움도 깊어지면 담청 빛
눈물로 고여
속울음 가슴앓이 뼈만 남은 팔뚝에

동풍에 넋을 갈아 깃발로 세운
엄마엄마 울던 아이 풍랑이 혼자 키운

국토의
막내야
해당화 한 송이도 못 피우는 작은 가슴에
무에 그리 한없이 담은 게 많아

오늘도 눈 부릅뜨고
잠 못 이루나
posted by 청라

산나리꽃 당신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10. 21:43

산나리꽃 당신

 
淸羅 嚴基昌
아내의 마음은
산나리 꽃빛이다.
한 줄기 가녀린 몸 위에
햇살 웃음 피워 놓고
언제나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아내의 눈동자는
하늘 담은 옹달샘이다.
때로는 내 마음에 티끌 일어나면
꽃구름으로 피어나서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내여
당신은 내 일상(日常)의 숲을 지켜주는
키 큰 산나리 꽃이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는
당신의 발걸음을 보며
다시 태어나도 당신 곁에 서서
거센 바람 막아주는 나무이고 싶다.

posted by 청라

향일암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9. 22:53

향일함(向日庵)에서

淸羅 嚴基昌
절 마당은
무량(無量)의 바다로 이어지고

무어라고 지껄이는 갈매기 소리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다를 지우며 달려온 눈보라가
기와지붕을 지우고
탑을 지우고

목탁(木鐸)소리마저 지운다.

지워져서 더욱 빛나는
관음상 입가의 미소처럼

나도 눈보라에 녹아서
돌로 나무로 바람으로 지워지면
갈매기 소리 알아듣는 귀가 열릴까.

겨울 바다는 비어서 깨끗하다.
비어서 버릴 것이 없다.

시학과 시창간호(2019년 봄호)


posted by 청라

논산의 하루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9. 22:51

논산의 하루


淸羅 嚴基昌
논산에 와서
하루만 살아 보게.

새벽은
은진 미륵불 입가에 번지는
미소로부터 열리고

금강에서 일어선 역사의 바람들은
득안땅을 아우르다가
노성산성에 와서 돌이끼가 되네.

점심 녘 논두렁길 걷다가
들판처럼 가슴 넓은 사람들과
막걸리 한 잔 나눠 마시게.

구수한 입담 속에 햇살처럼
번득이며
핏줄로 이어오는 호국의 정신.

논산의 저녁은
황산벌에 떨어진 꽃다운 원혼들 두런대는
풀꽃 그늘로 진다네.
posted by 청라

개구리 울음소리

수필/서정 수필 2007. 3. 9. 22:50

개구리 울음 소리


淸羅 嚴基昌
  어린 시절 못자리 할 무렵의 봄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개구리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산 그림자가 내려와 더욱 으슥한 산 다랑이 논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개구리들은 울어대고, 건너 마을의 삽사리도 따라 울어 더욱 정취 그윽한 마을을 꾸며놓곤 하였다. 먹을 것이 귀해 늘 배가 고팠지만,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마구 밀려들어오는 개구리울음소리에 취해 있노라면 살며시 졸음이 오고, 나도 모르게 행복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대전에 정착한 뒤로 나는 20여 년 간 거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논 하나 없는 도회 한복판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에 자동차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다. 먹고사는 것은 풍족해지고 걱정거리 하나 없는 생활인데도 어린 시절 개구리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던 그때만큼 숙면에 취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어쩌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그리워 고향에 가서 하룻밤을 새워도 개구리들은 옛날만큼 울지 않았다. 한 모금 울음으로 한 무더기 자운영 꽃을 피워내던 그 때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경칩 무렵 깊은 산 계곡 속의 돌을 뒤집어 개구리들을 잡아내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개구리는 더욱 줄어들고, 살아남은 개구리마저 쉽게 사람들의 눈이 뜨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1년에 하루 밤쯤 개구리 울음으로 도회의 속진(俗塵)을 닦아내던 나에게도 개구리 울음은 참으로 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농약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깊은 산 돌 속에 숨어도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개구리들을 생각하며 참으로 가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봄이 익어가던 어느 봄 일요일 날 홍성 처가에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칠갑산 산자락으로 난 도로를 돌아가고 있었는데, 열려진 차창 틈으로 문득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귀를 기울여 보니 내가 개구리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착각이 아니었나 싶게 딱 그쳐 있었다. 봄 풀 향기 그윽한 도로 가에 차를 멈추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시 한 수를 읊고 있었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개구리 울음 하나 지나갔다.

별똥별처럼
타버리고 다시는 반짝이지 않았다.


칠갑산 큰 어둠은
돌 틈마다 풀꽃으로
개구리 울음 품고 있지만

기침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
가슴을 닫았다.

차창을 더 크게 열어봤지만
청양을 다 지나도록 청양 개구리
꼭꼭 숨어 머리카락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열려진 차창 틈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개구리 울음. 유성처럼 한 번 빛나고는 다시 타오르지 않는 개구리 울음. 칠갑산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기척이라도 들릴까봐 꼭꼭 숨어있는 개구리의 두려움과 슬픔을 생각하며, 지구상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횡포가 심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인간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아무리 차창 문을 크게 열어봐도 다시는 들리지 않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모처럼의 봄나들이가 아쉽고,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것은 무슨 까닭일까.

posted by 청라

내가 만일 바람이라면

시/제3시집-춤바위 2007. 3. 8. 21:28

내가 만일 바람이라면


淸羅 嚴基昌
내가 만일 바람이라면
사비성 그 마을에 와선
더 오래 머무르겠네.

왕궁 터 부서진 기와 조각
부서져도 지워지지 않는
백제의 미소 위를 어른거리다가

궁남지 연꽃 속에 향기로 머무는
서동의 숨결 속에
녹아들겠네.

백마강 큰 가슴이 달을 품는 밤
고란사 종소리 실어
잠 못 드는 사람들 베갯머리로 보내주고

낙화암 절벽 위에
한 잎씩 떨어지는 진달래꽃잎
삼천궁녀의 짙붉은 흐느낌을 보겠네.

내가 만일 바람이라면
사비의 하늘 오래오래 떠돌다가
아무데도 가지 않겠네.

부소산성 돌 틈마다 눈물로 돋아
천 년의 세월을 외치고 있는
돌이끼에 초록으로 앉아 역사가 되겠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