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중독되다

바다에 중독되다

 

 

포말泡沫처럼 부서지면 다시

피어나지 못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배를 타고 나가면 무한한 자유가 범람하는

사나이 삶만 생각하는 거다.

 

어디로 향하든지 모두 길인 바다

수면을 차고 떠오른 달이

암청색 물결마다 반짝이는 알을 낳을 때

! 절대로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사내는

짭조름한 바다의 체취 만 맡아도 기침을 한다.

 

중독되는 건 잠깐이지만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바다의 매력

일만 대의 주사를 맞아도 치유할 수 없는

클레오파트라보다 더 치명적인

바다의 유혹이여

 

바다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말고

바다를 가슴 가득 끌어안아야지.

비워지면서 더욱 가득 채워지는 내 안의 바다

수평선으로 먼저 떠났던 우리의 절망들이

신선한 아침을 예인하여 돌아오고 있다.

 

posted by 청라

대후리

대후리

 

 

작은 목선들이 통통거리며

그물에 바다를 가두어두면

양쪽의 줄 사이에 걸려있는 바다

바다의 저 거대한 뚝심

 

어잇차 어잇차

온 동네 사람들 모여 바다를 당긴다.

손끝에 걸린 줄을 통해서

바다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야 버티지 마라

개도 아이들도 모두 나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백사장에는

줄 끝을 잡은 뒷산도 거들고 있다.

 

꽹과리 소리 높아질수록

마을도 들썩들썩 일어나 어깨춤을 추고

먼 수평 반짝이는 햇살 아래

버티는 바다의 뒤꿈치에서 일어나는

하이얀 풍랑

 

사람들의 마음마다 함성이 일면

한 끝씩 접혀가는 바다의 투지

힘주어 딛고 있는 힘줄이 끊어지며

황혼 아래 누워있는 실신失神의 바다

 

어잇차 어잇차

지난겨울 춤추던 폭풍의 칼날이 눕고

몇 사내가 버리고 간 유언이 빛나고

 

끌려온 바다는

우리들의 발밑에서 헐떡이고 있다.

 

 

posted by 청라

천수만에서

천수만에서

 

 

밤사이 철새들아, 안녕하신가.

 

기름띠에 갇혀

타르로 목욕하던

바다의 절망을 닦아낸 후

 

바다의 흥타령에

뽀얗게 윤기가 난다.

 

그래, 아직은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세상

 

 

posted by 청라

‘바다는 비가 와도 젖지 않는다. 세상의 눈물나는 일들은 모두 바다에 모여 있다. 바다는 스스로 늘 제 몸을 닦고 있지만 이미 흠뻑 젖어 더 이상 젖을 곳이 없다. 세상이 버리는 아픔, 모두 꽃으로 피울 수는 없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엄기창 시인. 고희(古稀)를 맞은 그가 2022년 임인년(壬寅年) 벽두 해양을 주제로 한 시집 ‘바다와 함께 춤을’(도서출판 시문학사)을 출간해 눈길을 끈다. 바다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깊은 성찰로 이를 형상화하고 내면화한 기획력과 독창성이 돋보인다.

그는 제1부 바다의 아픔, 제2부 일어나라 바다야, 제3부 출항의 아침, 제4부 남포동은 잠들지 않는다 등으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 ‘슬픈 바다’, ‘항구의 가을’, ‘처방전을 쓰다’, ‘바다는 가슴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출항의 아침’, ‘바다는 나를 염장(鹽藏)시킨다’, ‘초도에 내리는 별빛’, ‘태종대 안개꽃’ 등 총 75편의 작품을 담았다. 

그는 적조, 해양쓰레기, 기름·방사능 유출, 온실가스, 공장 폐수 등으로 오염되고 훼손된 바다의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 자연 그대로의 바다로 복원시킬 수 있을지를 고찰하며 환경과 생태 보전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희망이자 해양강국 대한민국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서정과 서사로 엮었다.  

바다가 처한 아픔을 진단하고, 바다를 향한 인간의 진심 어린 사과와 격려, 예찬을 노래한 시인은 “세계가 바다의 소중함을 새삼 인식하고 바다로 눈을 돌리는 신해양시대에 우리가 해양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의 해양 환경을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다 곁에 살면서 바다와 친구로 산 경험이 많다고 할 순 없다고 한 그는 “많은 분들의 바다 경험을 간접체험으로 빌려오고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좋은 해양 시를 쓰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양병호 시인은 “바다에 대한 다각도의 집중적인 시적 성찰을 통해 자연주의와 생태주의 세계관을 표상하고 있는 엄기창 시인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삶의 모델로 순수한 바다와 더불어 사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소박하고 조촐한 생활을 제시한다. 그는 바다의 순수성을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자로서 유랑의 자유와 초월의 욕망, 도취의 행복을 꿈꾸고 있다”고 평했다.

1975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엄기창 시인은 대전문인협회 시분과 이사·부회장, 문학사랑협의회장 등을 역임했고, 대전시문화상·정훈문학상·대전문학상·호승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가슴에 묻은 이름’, ‘서울의 천둥’, ‘춤바위’, ‘세한도(歲寒圖)에 사는 사내’ 등이 있다. 

 

뉴스1 최일 기자

뉴스경남 유용식 기자

posted by 청라

어머니 바다

어머니 바다

 

 

바다는

미나리 밭이다.

 

황토 빛 폐수廢水

바다에 들어가면

깊은 산 속 옹달샘 물이 된다.

 

간밤 봄비에

머리 감아 빗고

함초롬히 앉아있는 바다

 

품은 새끼들 살리려고 항시

마음을 정결淨潔히 닦는

바다의 몸에서

간 밴 행주치마 냄새가 난다.

 

바다는 어머니다.

 

 

posted by 청라

고해苦海

고해苦海

 

 

바다 가운데 나와 보면

알 수가 있지.

인생이 왜 고해苦海인지를

 

파도 한 자락 일어났다

스러지면

또 다른 파도가 일어서고

 

뱃머리에서 바라보면

삶의 바다는 온통 파도뿐이다.

 

절망 앞에서도

삶의 동력을 쉽게 끄지 말자.

힘들어도

묵묵히 달리는 배처럼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자.

 

오늘은 그냥 비운 채로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만선滿船으로

깃발 날리며 가는 날 있겠지.

 

 

 

posted by 청라

발해만渤海灣에서

발해만渤海灣에서

 

 

일만 사천 리 가쁘게 달려온

황하의 숨결

어찌 탁하지 않으랴

 

서해는

닦고 또 닦아

밤이면 별을 담는다.

 

posted by 청라

동해 일출

동해 일출

 

 

저 뜨거운 것을

바다는 어떻게 밤새 품고 있었을까

 

아플수록 더 깊이 끌어안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함성의 폭죽

 

시대의 밤아

가거라

 

바다의 외침은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

 

 

posted by 청라

바다 꽃

바다 꽃

 

 

꽃이라는 말에는 늘 슬픔이 머물다 간다.

어딘지 좀 가녀리고 바라봐줄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난다는

 

동백꽃도 아직 다 피지 않았는데

제주 앞바다엔 바다 꽃이 먼저 피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달거리를 하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일이다.

바람은 아직 칼을 물고 있는데

테왁 위에 몸을 얹으면 난류가 흐르는 사람

 

그녀가 거느린 억센 바닷바람이

서방을 잡아먹었다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빗창, 정게호미, 소살만 몸에 꽂히면

바다 꽃으로 피는 여자

 

햇살과 갯냄새로만 화장을 해서

십 년은 더 늙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수평선을 배경으로 꽃으로 피어있을 때

바다는 몸살을 한다.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에 노을을 칠해준다.

 

 

 

 

 

 

 

posted by 청라

바다는 가슴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아픔의 불씨 하나 묻어놓는 것

 

바다는 그래서

가슴에 발자국을 찍지 않는다.

 

안개 속에 숨어 혈서를 쓰듯

물 위에 제 이름을 쓰는 물새들

 

그 뒤를 따라가며

흔적도 없이 지우는 파도

 

바다는 한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다.

바다는 아파할 일이 없다.

 

 

문학사랑138(2021년 겨울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