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나리꽃

산나리꽃



사랑은

단 한 송이 꽃으로만 피어나야 한다.

 

마디마다 흔들림의

자잘한 개화開花를 참아내고

 

혼신의 힘으로 뽑아 올려

대궁 끝에 터뜨린

저 간절한 고백告白 한 송이.

2015. 7. 12



posted by 청라

서낭나무

서낭나무

 

 

꽹과리 소리도 멈췄다.

달그림자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속 빈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무나물에 밥 한 그릇도 받지 못하고

낡은 오색 천들만 힘겹게 꿈틀거릴 뿐.

아랫마을 고샅마다 집들이 비고

철마다 빌어주던 사람들의

믿음 다 떠나가고

길을 넓히려면 베어버려야 한다는

도낏날 번득이는 소리에 얼이 빠져서

삼신바위 올라가는 솔숲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

후드득 몸을 떠는

신기(神氣) 잃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있을 뿐이다.

 

 

2015629

<문학저널>2015년 11월호

posted by 청라

<청라의 사색 채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 분노한 20... 멍청한 노인들 탓에 경로사상이 무너졌다.” 라는 제목 밑에 박근혜 선택적 복지라서 표를 줬다고??? 나잇살 처먹을 만큼 처먹고도 아직 덜 당했냐!” “그리 당하고도 젊은이들 앞길 가로막는 노인들... 그냥 일찍 뒈져라....” “20, 노인에게 절대 자리 양보하지 마!”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주세요.” “기초노령 연금 제도 폐지를 원합니다.” 등등의 노인들에 대한 갖은 험담이 실려 있었다. 할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버지 없고,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 없으니 이 글을 올린 젊은이나 그 밑에 서명한 사람들도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을 것이다. 이런 글을 올리고 어찌 편안한 얼굴로 그 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문득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를 위해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볼품없이 허옇게 꺼진 연탄재이지만, 그래도 한때 불이 활활 타오를 때는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불덩이였던 존재, 자신의 몸을 다 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데워줬던 연탄이 재로 변하여 구석에 쌓여져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모습이 마치 오늘날 노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 있게 하는 말이지만 이 시대의 노인들은 국가로부터 보상받고 젊은이들로부터 공경 받을 자격이 분명히 있다. 일제에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아오고 6.25 후의 참담했던 폐허를 이만큼 가꾸고 일궈온 것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어린 시절엔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었고, 나라는 필리핀, 아르헨티나 심지어는 북한보다도 경제적 여건이 형편없었다. 산은 헐벗을 대로 헐벗은 민둥산이었으며 전국의 도로망과 항만시설은 발전의 고동을 울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공장을 세우고, 길을 내었으며, 산에 나무를 심고,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여 가옥 개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노인들이다. 자식들과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해 일할 곳만 있으면 청탁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까마득히 우러러보던 유럽의 여러 나라보다도 잘 사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정치적 의견이 좀 다르다고 뒈지라고? 멍청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지 말고 무임승차 제도 폐지해 달라고? 민주주의가 바로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보완되고 협조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제도가 아니던가? 6.25를 겪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잔악함을 경험한 노인들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혁신의 기치 아래 다시 시작하는 진보보다 안정된 상태에서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보수를 더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조국을 위해 아직 벽돌 한 장 올려놓은 적 없는 젊은이들은 온몸을 불태워 후손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허연 재로 남아있는 연탄재 같은 노인들을 발로 찰 자격이 없다.

 

                             <금강일보> 2015년 6월 26일자

posted by 청라

목척교 戀歌

목척교 戀歌

 

 

비오는 날 목척교에 나가보자.

슬픈 눈빛의 여인 하나 만날 것 같다.

소주 한 잔에 체온을 나눠 마시며

황톳물에 퍼다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 젖은 사연

도란대는 물소리 듣다가보면

우리들의 슬픔은

바람에 스쳐가는 자잘한 이야기일 뿐.

보문산 소쩍새 소리 불러다가

그녀의 진회색 미소 위에

목거리처럼 걸어줬으면 좋겠다.

교각에 걸려있는 영롱한 불빛으로

마음 밭에 숨어있는 그늘을

말끔히 씻어줬으면 좋겠다.

봄이면 그네 뛰고 놀던 추억들이

물안개로 피어나는 목척교에 서면

대전천 물들은 서 있는데

우리들의 사랑은 어디론가 흘러간다.


 

2015612

<대전문학>69호(2015년 가을호)

<심상>2016년 6월호


 

posted by 청라

장미

장미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인가

서둘러 담 위로 기어 올라와

고갤 길게 내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저 불타는 갈망,

빈 골목길 회오리바람에 검불만 날려도

온몸 떨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다.

지난겨울 혼자 살던 할아버지 산으로 가고

대문 굳게 닫힌 울안 

빈 집 속의 적막으로 봉오리 부풀려

한 등 눈물로 켜든 저 짙붉은 외로움.

 

 

201562

대전문학2016년 여름호(72)

『심상2016년 6월호

『한국 시원』2018년 여름호(9호)

posted by 청라

<청라의 사색 채널>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진다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한비자의 외저설 죄상편(储說·左上篇)에 보면 상행 하효(上行下效)’라는 말이 나온다.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이 본받는다.’ 또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뜻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춘추오패(春秋五霸) 한 사람인 제환공(齐桓公)은 평소 보라색 옷을 즐겨 입었다. 이에 조정 대신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제나라 도읍은 온통 보라색 천지가 되었고, 보라색 옷감 가격은 껑충 뛰어 보라색 비단 한 필의 가격이 흰색 비단 다섯 필의 가격과 맞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제환공이 대신(大臣) 관중(管仲)을 불러 말했다.

  “보라색 비단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으니 가격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게그러자 관중이 입을 열었다.

  “아뢰옵건대 폐하께서 먼저 보라색 옷을 멀리하고 보라색 옷 입은 사람들을 멀리 하옵소서

  다음날 조회에 참석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환공이 좋아하는 보라색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때 제환공이 갑자기 손으로 코를 막더니

  “보라색 옷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가까이 오지들 말거라.”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조정은 삽시간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진 대신들은 저마다 입고 있던 옷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날부터 대신들은 모두 보라색 의상을 벗고 전에 입었던 옷들을 도로 꺼내 입었다. 그 후로 백성들도 더는 보라색 옷을 찾지 않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제나라 도읍에서는 보라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어 옷감과 물감 가격도 다시 안정되었다.

  요즈음 눈만 뜨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정치인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제환공처럼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이 본받도록 실천하는 사람들은 보기 어렵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원, 법관과 같은 지도층의 행동이 바르지 않으니 국민들이 보고 배울 것이 없다. 늘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누구를 뽑아놔도 다 똑같아. 뽑을 사람이 없어.”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들이 항시 읊조리는 절망적인 말이다. 정말 뽑을 사람이 없다. 누구를 시켜놔도 제 당과 자신의 이익에만 민감하고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진충보국하는 정치가는 없다. 새로운 사람을 선택하고 기대하지만 지나고 보면 늘 그 타령이다. 왜 그럴까? 바로 정치가들의 텃밭인 국민들 자체가 정치가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비리에 침을 튀기며 분노하지만 국민들 하나하나가 불의한 큰 이익 앞에서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고? 이오십보 소백보다.

  정치인들 욕만 하지 말고 국민들 모두 스스로의 행동을 정화하자. 누구를 뽑아놔도 깨끗하고 진정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게 텃밭을 닦아놓자.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도 맑아지는 것이.  


                                                                         <금강일보> 2015년 5월 29일 

posted by 청라

스승의 날에

스승의 날에

 

 

철쭉꽃 모여

타오르는 산

가까이에서 보면

가끔은 벌레 먹은 꽃잎도 있네.

 

꽃잎 하나 태우려고

모두가 저 꽃밭에 불을 지르는가!

 

스승의 날에…….

 

2015. 5. 15

 

 

 

posted by 청라

<청라의 사색 채널>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

 

                                                                            엄 기 창

                                                              시인,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견리사의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이라는 말씀은 원래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안중근 의사님의 유묵(遺墨)으로 더 유명해진 말이다. 이익을 보면 먼저 의로운 재물인가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치라는 이 말은 이익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고, 이익을 위해서는 국적을 바꾸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큰 교훈이 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자주 안부를 물어오던 제자에게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없어 직장으로 전화를 했더니 보직해임 되어 나오지 않았단다. 하도 기가 막혀 이유를 물었더니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단다. 본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영 받지 않는다. 자식 놈이 그런 일을 당한 듯 궁금하고 속상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소식을 알 만한 그의 친구들에게 다섯 번짼가 전화를 걸었더니,

선생님, 걔 돈 먹고 잘렸대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고놈이 괘씸했지만 참고 연유를 물어보니 옛날 돈을 조금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보직해임이 되었단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한동안 세상을 다 잃은 듯 넋을 잃고 있었다.

  교직생활 초기에 시골 면 소재지 고등학교 아수라장의 분위기 속에서 열정을 다하여 키워낸 금쪽같은 제자였다. 어수선한 면학분위기 속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서울 근교의 명문대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고, 경찰 간부시험에 합격하여 총경까지 승진한 제자였다. 정의롭고 봉사심이 많아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제자였다. 대전에 와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등 자랑스러운 제자들을 수없이 길러냈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 엉겅퀴처럼 스스로 자란 제자이기에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였다. 그런 제자가 작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허무하게 앞길을 망친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었다.

  이로움이 눈앞에 있을 때 과연 의로운 이로움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평소에 더없이 청렴하고 깨끗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도 재물이 눈앞에 있을 때 의로운 재물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기보다 과연 이걸 먹고 걸릴까 안 걸릴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다가 설마 걸리겠어.’하고 꿀꺽 삼켰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요즈음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도 견리사의(見利思義)의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의롭지 못한 뇌물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그들은 한 번의 잘못 판단으로 전도양양하던 정치생명도 끝장이 나고, 그들을 신뢰하던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국적을 버리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견위치명(見危致命)의 교훈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눈보라 치는 만주벌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은 자신의 목숨이 귀한 줄 몰랐던 분들일까. 나라가 있어야 생존권이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자신의 발전과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선구자들이다. 국민들 모두 양심이 살아있어야 나라가 번창하고, 나라가 건재해야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행복마저 지켜진다는 것을 깨닫고 견리사의 견위치명(見利思義見危致命)의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금강일보> 2015년 5월 1일  

posted by 청라

보성 차밭에서

보성 차밭에서

 

                 엄 기 창

 

 

차나무 가지 끝마다

혼(魂)불 환하게 밝혀드는

저 연초록 손들을 보아라.

흰 눈을 이고 견딘 겨울의

뚝심을 모아

쌉싸래한 맛 속에 숨어있는

상큼한 차향(茶香)을 일으켜 세우나니

삼나무들도 어깨동무하고

눈짓 주고받으며

제암산(帝巖山) 정기를 퍼내어 끝없이 보내주고 있다.

득량만(得粮灣) 파도야,

대양(大洋)을 치달리던 폭풍의 노래들을

엽록소에 담아주려고

밤새도록 뻘밭을 기어오르느냐.

보성 차밭머리에서

성스러운 차 한 잎을 피우기 위해

정결한 머리로 기도하는 오선(五線)

선율에 취해

다시는 일상(日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2014. 4. 25

<문학사랑> 2015년 여름호(112호)

 

 

posted by 청라

歲寒圖에 사는 사내

歲寒圖에 사는 사내

 

 

그 집에는

울타리가 없다.

사방으로 열려서 신바람 난 바람이

울 밖 같은 울안을

한바탕 휘젓다 가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그 집 사내는

청청한 외로움을 가꾸기 위해

덩굴장미 한 그루 심지 않았다.

덩그렇게 세워 놓은 네그루의 소나무에도

새 한 마리 불러오지 않았다.

제대로 외로움을 즐기기 위해

평생을 마음 밭에 겨울만 들여놓고

뜰 밖을 둘러 친 울타리 대신

서릿발 같은 기상 온 몸으로 반짝이며

아예 방문을 지워버리고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고개를 내미는 법이 없다.

 

2015. 4. 17

<대전문학>68호(2015년 여름호)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