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개비

시/제3시집-춤바위 2008. 3. 21. 17:20
 

바람개비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며

바람개비를 돌린다.

이순의 길목에서

반짝이던 사랑을 모아

아픔이 노을처럼 고이는

하루의 끝에 서면

어둠이 내려오는 골짜기마다

눈물로 반딧불은 날아오르고,

바람의 켜켜마다 숨은

세월(歲月)의 이야기로

깃발 펄럭이듯 돌아가는 바람개비.

누구에게 보내는 간절한 노래인가.

저무는 들판엔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도 없고,

시간이 피었다 지는 풀숲 언저리로

이름 모를 들꽃만 고개를 내미는데

기다림의 노래가 곱게 배인

한지(韓紙)의 날개마다

건강한 바람

심지를 세우고

돌려도 돌아오지 않을

새벽을 기다리며

작은 날갯소리 그대 마음에

등대처럼 반짝이도록

모든 것이 비워지는 빈 들판에서

작은 것을

채워주는

바람개비를 돌린다.


posted by 청라

남가섭암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27. 09:23
 

남가섭암


사바세계 신음소리

가장 잘 보이는 산정 위에

남가섭암


상수리나무 잎 스쳐가는

푸른 바람에

목탁소리를 실어 보내 다독여주고


천수경 자락에 묻은

뻐꾸기 소리

한 모금에도


적막을 못 견디어

제 살 비비는

억새풀 하나


posted by 청라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수필/서정 수필 2008. 2. 25. 15:10
 

  내가 중국에 갔을 때의 이야기다. 소주의 ‘졸정원’ 관광 중에 일행 중 하나가 무심코 씹던 껌을 뱉은 일이 있다. 뒤따라오던 노인 한 분이 화장지를 꺼내더니 그 껌을 곱게 싸서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다. 곁에 다가가서

  “할아버지, 그 껌 무엇 하려고 그러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 할아버지가 무어라고 말하는데 중국말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옆에 따라오던 통역이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한답니다. ‘졸정원’이 더러워지는 것은 중국의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라고 통역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커다란 감동이었다. 문화재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문화재 위에 떨어지는 작은 티끌 하나라도 줍는 저 노인의 자긍심이 모여 오랜 잠에서 깨어나 바로 거인으로 발돋움하는 중국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난 2월 11일 새벽 ‘숭례문’이 화마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들은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숭례문’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축조된 것이니 햇수로 612년이 된 건물이다. 서울의 도성 정문으로서 우리 민족의 부침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며, 서울시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병란도 피해갔으며, 일제치하에서 조선 문화의 잔재를 말살하려던 일본인들조차 보호해 주었던 민족의 자존심과 얼이 담겨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국보 1호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이 건물이 자연 발생적 화재도 아니고 우리 국민 중 1인의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니 참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조상들에게도 죄송스럽고, 국보 1호를 보존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부끄럽다. 이제 국민 성금이나 국고를 통해 ‘숭례문’을 재건축 한다고 하는데 겉모습은 다시 세울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역사는 어찌 되살릴 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한 나라라 하더라도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선진국들은 산업화 속에서도 문화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경제적 풍요를 위해서도, 교통의 편리를 위해서도 쉽게 문화재를 훼손시키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문화재 한 귀퉁이에 낙서를 한 곳도 없으며, 기분이 나쁘다고 발길질하는 사람도 없다. 세익스피어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랭보를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문화의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오랜 역사적 유적지를 망설임 없이 옮기는 나라, 심심풀이로 문화재 벽에 낙서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작은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국보 1호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나라, 그런 나라의 국민인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전통을 소중하게 계승하려는 노력을 하는 나라, 자신의 문화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


  국민들의 자부심을 남김없이 불살라버리고 조금의 뉘우침도 없는 뻔뻔한 방화범 그 노인의 얼굴을 보며, 소주 ‘졸정원’에서 껌을 주워 주머니에 넣던 그 노인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posted by 청라

단풍

시조 2008. 2. 24. 20:50
 

단 풍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뜨겁게 사르려고


가슴 깊이

묻었던 사랑

모닥불로 피워 올려


피울음

끓는 아우성

온 세상을 태운다.


posted by 청라

달맞이꽃

시조 2008. 2. 23. 23:35
 


 달맞이꽃


예닐곱 살 소녀의

투정처럼 피어나서


꽃잎마다 반짝이는

천 개의 달빛을 받아


그리움

안으로 익은

청청한 저 목소리


 


posted by 청라

봄의 들판에서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21. 09:56
 

봄의 들판에서


초록빛 숨결 움터오는

봄의 들판에 서면


굳게 동여매진 사랑의 매듭이

풀릴 것 같아


내 눈빛이

당신의 마음에

냉이 맛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꽁꽁 얼어붙은

당신의 겨울에

작은 제비꽃 한 송이 피울 수 없으랴.

posted by 청라

철조망

시조 2008. 2. 19. 10:29
 


<시조>


철조망


산줄기 갈라 뻗은

대진 고속도로 옆


건넛산 그리움에

넋 잃은 고라니 한 마리


몽롱한 눈동자 속에

피어오르는 오색구름




밤마다 꿈속에선

바람에 날개 달아


그리움 매듭 풀어

이슬 눈물 뿌렸지만


새벽녘 꿈 깨어 보면

건널 수 없는 철조망

posted by 청라

서해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8. 08:20
 

서해


돌을 닦는다.

기름 속에 묻혀있던 이야기들이

햇살 아래 드러난다.


속 빈 조개껍데기와

검은 기름에 찌든 미역 속에 배어있는

어부의 눈물


세월이 갈수록 씻어지지 않는

바위 같은 슬픔이 여기 있다.


눈이 내려서 백장에 쌓여도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

저 긴 해안선 위의 절망


기름 물로 목욕한 갈매기들은

날아오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하얗게 배를 드러낸 물고기

물고기의 살밑으로 스며드는

저 짙은 어둠

 

파도는 오늘도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서해의 신음을 닦아내고 있다.


.


posted by 청라

弔 숭례문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6. 16:29
 

弔 숭례문


유세차

무자 2월 신사 삭

오, 애재라

불꽃 속에 사라진 숭례문이여


미명의 새벽 서울 하늘

붉게 물들인 화광이

사람들의 새벽 꿈밭을 불태울 무렵


나는 들었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이 무너지는 소리를


숭례문이여!

육백년 넘게 우리를 지켜온

너는 역사의 증인.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비껴서 갔다네.

일본놈도 떼놈도

고갤 돌리고 갔다네.


남들도 우러러 피해간

성스러운 가슴에

우리 스스로 불을 놓았구나.

민족의 얼을 살라 버렸구나.


이제 다시 옛모습 다시 세운다 해도

수많은 세월 지켜본 네 기억

사라진 역사는 어이할이거나.


posted by 청라

겨레의 스승

시/제3시집-춤바위 2008. 2. 14. 21:53
 

<訟詩>


    겨레의 스승


              김선회 교장선생님의 전년퇴임을 축하하며

                                             엄 기 창



당신은

산바람에 씻기고 씻긴

소나무처럼

올곧은 기개를 지닌 사람


물처럼 부드럽게

바른 곳으로만 흘러 흘러

제자들의 마음도

맑게 씻겨준 사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빛을 세워

세상을 시나브로 밝혀가면서


묵묵히 걸어온 당신의 발걸음은

제자들을 위한 눈물로

사십년을 넘겼습니다.


돌아보면

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고개를 넘어

당신의 삶의 발자국 점점이 찍힌 길


질기디 질긴

인연의 줄을 접으며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당신은 참으로 큰

겨레의 스승입니다.

posted by 청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