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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0 내려갈 때 보았네
- 2020.10.27 삼척에 가면
- 2020.10.24 유등천의 가을
- 2020.09.21 삶 3
- 2020.09.11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 2020.09.01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시정신
- 2020.08.26 죽서루의 달
- 2020.08.18 장마
- 2020.08.16 자화상
- 2020.08.04 내가 사랑하는 공주
글
내려갈 때 보았네
가장교에서 유등천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능소화 덩굴이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다. 7월 하순부터 꽃봉오리들이 조롱조롱 맺히기 시작해서 어느 날 아침 무심코 바라보면 이 줄기 저 줄기에서 적황색 화려한 꽃등들이 피어난다. 아내와 함께 유등천변 산책길로 내려가다가 나는 문득 그 불쑥불쑥 솟아나는 꽃들이 아내가 내뱉는 볼멘소리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아온 지 어느덧 40여 년, 아내라고 어찌 불평이 없었겠는가.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학교에만 매달리는 남편 때문에 혼자 그 억센 아들 둘을 키우다시피 한 아내. 그런 속에서도 아내는 한 마디 불평조차 없이 긴 세월 인종의 자세로 견디어 왔다.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화려한 능소화의 몸짓 뒤편에 숨은 멍든 꽃잎, 벌레 먹은 꽃잎, 시든 꽃잎들이 마치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고 숨겨온 아내의 아픔처럼 눈에 들어왔다. 저런 아픔들을 끌어안고 아내는 그 오랜 시간을 견디어온 것이었다. 나는 시조 한 수가 선명한 그림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다물고
참다 참다
터져버린 볼멘소리
귀담아
듣다 보면
송이송이 진한 아픔
아내여, 긴 세월 견딘
인종忍從 벗어 버렸구나.
엄기창, ‘능소화’ 전문
치매를 앓기 시작한 후 아내는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참지 않고 쫑알쫑알 불평을 잘도 말한다. 가슴에 콕콕 와 닿는 그 말들이 송알송알 피어나는 능소화 꽃송이 같다. 치매로 인해 원래 지니고 있던 신념이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늙어가면서 그동안의 삶에 억울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단하던 인종의 자세가 깨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나는 오히려 아내의 그런 태도가 반갑다. 이제는 아내나 나나 길다면 긴 인생길에서 내려오는 길로 한참은 내려왔다. 황혼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 서로를 인식해 할 말도 못하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선생님의 ‘그 꽃’ 이라는 시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올라가는 길에는 왜 그 소중했던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결혼 다음해 겨울 첫 아이를 낳고 돌처럼 차가웠던 셋집 단칸방에서 아이만은 따뜻한 곳에 누이려고 몸살 앓던 아내의 아픔. 보리밥이 먹고 싶다고 조르는데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안 가고 뻗대다가 아내를 울리고 말았던 철없는 세월. 그 젊은 날에는 왜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걸까.
우리는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도 아픈 것들도 보지 못하고 있다. 봄꽃들의 다정한 속삭임도, 새들의 노랫소리도, 여름날의 무성한 녹음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가을날이 되어서야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단풍의 현란한 몸짓에 멈춰 서서 한참을 감탄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유등천 산책길을 걸으며 아내와 손을 꼭 잡고 걷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는 아내가 잡는 손을 창피하다고 뿌리쳤었는데 요즈음은 오히려 내가 아내의 손을 틀어잡는다. 그리고 벤치에 함께 앉아 올라가는 길에서는 보이지 않던 두루미며 청둥오리며 물총새들의 삶을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 이제야 나는 웃음 뒤에 숨은 아내의 아픔도 슬픔도 말갛게 볼 수 있는 눈이 뜨인 모양이다.
아내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꽃 이름을 몇 번을 가르쳐 주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에도 가르쳐준 꽃 이름을 또 다시 물어본다. 나는 내려가는 길에서야 이제 철이 들어서 열 번을 물어도 활짝 웃으면서 가르쳐준다.
“여보, 이거 무슨 꽃?”
“금계국”
“응, 금계국”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천 번을 물어봐도 짜증내지 않고 기꺼이 가르쳐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요즈음 돌부처나 십자가가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두 손을 맞잡으며 나직하게 읊조린다.
“딱 지금만큼으로 30년만 가게 해 주세요”
글
삼척에 가면
바다의 탁본拓本을 뜨러
삼척엘 갔네.
그믐밤의 어둠을 짙게 칠했다가
초하루 아침의 맑은 햇살로 벗겨내면
파도의 싱싱한 근육들과 갈매기 소리,
삼척 사람들 다정한 미소가
해국海菊으로 피어있네.
태백을 넘어올 때 서둘러
손 흔들던 가을이
죽서루와 어깨동무로
빨갛게 타고 있는 곳
찍혀 나온 바다엔
좋아하면 모두 다 주는
삼척 사나이의 막걸리 맛 웃음소리가
산호초 사이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2020. 10. 27
『시문학』598호(2021년 5월호)
글
유등천의 가을
두루미 한 마리가
먼 산을 보고 있다.
한 다리로 지탱하는
외로움의 무게만큼
두루미 길게 늘인 목
기다림의 절절한 길이
한 달 째 오지 않아
옆구리에 퀭한 바람
보여줄 코스모스
피었다 다 지는데
휘도는 구름 그림자
물소리에 익는 적막
글
삶
꽃 지는 날 있으면
꽃 피는 날 오고
눈물 이운 자리에는
환한 웃음이 핀다.
그대여, 오늘 막막하다고
아주 쓰러지진 말게나.
삶은 늘 출렁이는
파도 같은 것
2020. 9. 21
글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때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찻집에서
두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홀로 커피를 마신다.
외로움이 커피 향으로 묻어난다.
창밖 먼 바다엔 어디로 가는지
배 한 척 멀어지고
유리창에
갈매기 소리들이 부딪혀 떨어진다.
이별을 말하던 날 빛나던 해당화는
다홍빛이 아직 다 바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노을 지는 저녁이면 여기에 와서
쓸쓸히 바다에 취해있는가.
주인 없는 찻잔을 바라보며
긴 한숨 내뱉으면
그리움은 사랑보다도 달콤하다.
2020. 9. 11
『문학사랑』134호(2020년 겨울호)
『시문학』598호(2021년 5월호)
글
이달의 문제작〈시〉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시정신
김기덕〈문학평론가〉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단 하나의 이론, 우주의 모든 섭리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찾고자 연구에 매진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인슈타인이 연구하던 통일장이론은 지상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끈이론이라는 새롭고 급진적인 이론을 통해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충격에 빠질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고, 현실은 실제와 공상과학이 뒤섞인 세계라는 것이다. 만물의 이론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끈이론의 기본 개념은 제일 작은 입자에서부터 머나먼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물질이 단 하나의 끈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 끈은 진동하는 에너지이며, 우주는 진동하는 끈들의 연주로 만들어낸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도록 배운다. 다양한 공동체 안에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구성원으로서 언어 소통을 통해 사회적 참여와 보편적 사고를 가지며, 자기 이해를 위한 모든 만물로 이루어진 끈을 향유한다. 세상 만물은 끈 아닌 것이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끈에 의해 연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끈의 에너지들이 인간을 구성하고 사고하게 한다. 세상에 충만한 끈의 에너지들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나의 삶은 독자적인 삶이 아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도 유기적 관계를 가지며 공동체적 관계를 이루고 살아간다. 인간은 공동체적 삶의 관계 속에서 오류가능성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고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 나간다. 그러한 자아성찰로 시인들은 언어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하나의 끈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삶의 거대한 융합을 거쳐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다.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 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중략)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엄기창,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일부
엄기창 시인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와 포크레인에 파괴되어 가는 고향마을을 대비하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다. 아내의 뇌 속에서 뇌세포들이 파괴됨으로써 금가루 같이 아름다운 기억들이 사라져간다. 그것은 어린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고향이 개발의 시대적 흐름에 밀려 파괴되는 것과 동일시된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자연의 파괴를 망각으로 환치시켜 아름다운 순간들이 다 지워진다 해도 아내의 수첩 속에서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삶은 절박한 현실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포크레인이 하전을 파괴할 때 엄기창 시인의 어린 날들이 파여져 나가고, 아내의 기억 속에서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리는 것은 운명공동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의 하천의 파괴는 곧 엄기창 시인의 추억의 파괴이며, 아내의 소중한 기억의 파괴가 된다. 그 속에서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 고향에 남듯 아내의 수첩 속에 남기를 소망하는 것은 아내와 동일화된 존재로서의 간절한 염원이 된다. 변하는 현실 속에서 엄기창 시인은 시간을 뛰어넘어 천륜적 사랑의 끈을 끝끝내 놓지 않으려 한다.
『시문학』2020년 9월호(590호)
글
죽서루의 달
동해에서 막 건져 올린 달이
겹처마 맞배지붕에 앉아 있다
죽서루 달빛에서는
천 년의 이끼 같은 향기가 난다.
삼척 사람들
오래 가는 사랑처럼
파도 소리에 삭히고 삭혀
만삭으로 익은 달
오십 여울 돌아 달려온 태백산 물도
죽서루 달빛에 취해
밤새도록 절벽을 오르고 있다.
2020. 8. 26
『시문학』598호(2021년 5월호)
글
장마
하늘의 숨결 모아
대청호는 만삭이다.
어릴 때 묻고 떠난
내 풋사랑 익었을까
그리움 연꽃으로 올라
대청호는 순산이다.
2020. 8. 18
글
자화상
내 가슴엔 여백이 많아
채울 것도 많았지.
사하촌寺下村에 살면서
새벽에 떠내려 온 풍경소리 건지면서
부처님 미소를 마음에 심었네.
부처님과 가장 닮은
아이들과 살고 싶어서
나라 말을 공부했네.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세월 가는 줄도 몰랐네.
친구들은 나를 보고 부처라 하고
제자들은 나를 보고 스승이라 했지만
나는 부처도 스승도 되지 못했네.
세월의 바퀴에 감겨
이만큼 지나와서 생각해보니
삶의 폭풍 속에서도 나를 견디게 해준 건
반짝이는 몇 편의 시詩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기쁨이며
행복이 되려 하네.
서툴지만 진실한 마음을 담은
나의 노래로.
글
내가 사랑하는 공주
공산성에서 가을에 취해 있다가
금강으로 와서
얼굴을 비춰보면
내가 걸어온 발자국들도
코스모스 꽃씨만한 역사가 될까.
공주 거리를 걷다가 보면
은행잎처럼 밟히는 게 다 역사다.
석장리 유적지엔
못 다 이룬 구석기 시대의 사랑
무령왕릉에선 백제의 웃음소리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의 눈빛에서도
이끼처럼 푸르른
역사의 향기가 풍겨오고 있다.
금강교를 건너서
공주의 품에 안긴 사람들은
공주에 취해서 모두 공주 사람이 된다.
202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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