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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戒盈杯
등산길에 한 친구가 K선생님 소천 소식을 전했다. 약간 시끄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니 그렇게 건강하고 열정적이던 분이 왜 갑자기?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짐작하는 바는 있는 것 같았다. 노욕老慾이 그 분을 망쳤을 것이다. 교수로 정년퇴임을 했으면 조용히 쉬면서 못다 한 학문 연구나 하실 것이지, 다 늦게 웬 사립전문학교 총장을 한다고 그 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송사訟事에 휘말려 갖은 고통을 겪었으니 강철 같은 그분의 정신력으로도 아마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몸을 망친다. 나는 문득 계영배戒盈杯의 교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계영배戒盈杯란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을 어느 한도 이상 따르면 술잔 옆에 난 구멍으로 술이 새도록 만든 잔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인 제환공齊桓公이 군주의 올바른 처신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경계하려고 늘 곁에 놓아두고 마음을 가지런히 했던 그릇(欹器)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 불리기도 했다. 『순자荀子』에서 보면, 후에 공자孔子가 제환공의 사당을 찾았을 때 그릇에 구멍이 뚫려 있음에도 적당할 땐 술이 새지 않다가 지나치게 채웠을 때 술이 새는 이 잔을 보고 제자들을 둘러보며,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한다며 이 그릇의 의미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는 온 세상을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말랐던 논과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고, 시들거리던 초목도 기운을 차려 보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푸르고 싱싱하게 한다. 그러나 이 비가 지나치게 내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면 오히려 이 땅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젊은 시절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기운도 능력도 떨어질 때가 되면 지나친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술을 어느 한도 이상 채우면 술이 새도록 만든 잔처럼 욕심이 지나쳐 몸을 망칠 때쯤이면 스스로 정화시킬 수 있는 자기 처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2019. 10. 7
글
부처님 웃음
부처님 웃음 길으러
마곡사麻谷寺 다녀오는 길에
산 아래 찻집에서
한 바가지 떠 주었더니
웃음 탄 연잎 차 맛이
향내처럼 맑고 깊다.
덜어도 줄지 않는
저 무량無量한 자비慈悲의 빛
구름 낀 세상마다
꽃으로 피는 저 눈짓을
아내여, 혼자 보라고
대낮같이 밝혔겠는가.
향불 꺼진 법당에서도
겁劫을 건너 웃는 뜻은
사바 업장 쓸어내는
범종소리 울림이라
오가며 퍼준 그릇이
텅 비어서 가득 찼네.
2019. 10. 5
글
산촌의 겨울
아무도 오지 않아서
혼자 앉아 술 마시다가
박제剝製로 걸어놨던
한여름 매미소리
산山 나물 안주삼아서
하염없이 듣는다.
방문을 열어봐야
온 세상이 눈 바다다.
빈 들판 말뚝 위의
저 막막한 외로움도
달콤한 식혜 맛처럼
복에 겨운 호사好事거니.
가끔은 그리운 사람
회재 고개 넘어올까
속절없는 기다림도
쌓인 눈만큼 아득한데
속세로 나가는 길이
꽁꽁 막혀 포근하다.
글
어머니 마음
어머니 오시던 날
보자기에 산山을 싸 와
비었던 거실 벽에
산수화로 걸어 두어
지쳐서 눈물 날 때마다
산山바람소리로 다독이네.
2019. 10. 2
글
풍악산豊岳山
털털하게
섞여서 산다.
정 많은
사내처럼
뾰족했던 젊음들을
익히고 다스려서
온 산이 눈부신 환희歡喜로 타오르고 있구나.
2019. 10. 1
글
꽃씨
코스모스
까만 꽃씨에
숨소리가 숨어있다.
살며시 귀를 대면
솜털 보시시한
벽 깨자
삐약 하고 울
박동搏動소리가 숨어있다.
2019. 8. 28
글
거꾸로 선 나무
세상은 안개 세상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옳은 것 그른 것도 능선처럼 흐릿하다.
물 아래 물구나무로 입 다물고 섰는 나무.
거꾸로 바라보면 세상이 바로 설까
호수에 그림자로 뒤집어 다시 봐도
정의도 불의도 뒤섞여 얼룩덜룩 썩고 있다.
여명이 밝아 와도 배는 띄워 무엇 하랴.
부귀도 흘러가면 한 조각 꿈인 것을
차라리 물 깊은 곳에 집을 틀고 싶은 나무
2019. 9. 25
글
산울림
비 온 후 계족산이
새 식구 품었구나.
눈빛 맑은 물소리와
새 사랑 시작이다.
마음이 마주닿는 곳
향기 짙은 산울림
2019. 9. 23
글
별
높은 곳에 떠 있다고
모두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빛이 난다고
모두의 가슴에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그믐의 어둠 앞에 선 막막한 사람들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하나 둘 깨어나는 별
세상이 캄캄할수록
별은 더 많이 반짝인다.
별이 반짝일 때마다
막막했던 가슴마다 한 등씩 불이 켜진다.
나는 언제나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위안을 주는
별 같은 사람이 되랴.
2019. 9. 21
『시와 정신』72호(2020년 여름호)
글
생가 터에 앉아
버려진 구들장을
슬며시 뒤집으면
무심코 흘리고 간
어린 날 내 웃음소리
누나야
수틀에 담던
뽀얀 꿈은 어디 갔나.
무너진 골방 터엔
어머니 베틀소리
누군가 베어버린
감나무 썩은 둥치
아버지 못다 한 꾸중
회초리로 돋아있다.
물 사발로 다스렸던
허기증도 그리워라
육 남매 쌈박질로
몸살 앓던 마당에는
머언 길
돌아와 보니
콩 포기만 무성해라.
2019.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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